삶, 철학 깃들이기..

by 어공
<제국> 1부 1장. 세계질서
사법권은 '군사력'의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세계질서는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국민국가의 질서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과 동일하다. 우리는 사람을 때려서는 안되고, 돈을 훔쳐서는 안된다. 타인에게 과도한 피해를 주는 행동을 우리는 '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이 같은 보호를 충분히 '질서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보호의 주체는 두말할 나위없이 '국가'다.

그렇다면 '세계질서는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그것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권리를 지닌 '사법적 구성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일차적이다. 우리는 그것의 대답을 UN에서 찾을 수 있다. UN에서 만들어지는 주권과 국민국가가 가진 주권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해 UN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은 근대세계가 '제국'으로 이행하고 있다는(이는 네그리와 하트가 <제국>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사실 그 자체다) 사실을 밝혀주는 역사적 지렛대로써의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오늘날 제국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 사법권의 발현 형식을 근대 국가의 그것과 비교하여 생각하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근대 국가의 주권 개념은 홉스와 로크의 저작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초월자로써 국가를 설정한다. '개인' 위에 군림하며, 군사권의 독점을 통해 그들의 행위를 통제하는 집행자로써의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 이에 대해 로크는 국가를 개인과 개인이 맺은 다원적 구성체로써 토론과 합의를 통해 개인의 행위를 통제하는 자율주의를 주장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근대 국가안에서 군사력의 발현 형식이다. 근대적 사법체제 안에서 군사력은 내부적으로 '치안유지'를 위한 경찰권을, 외부적으로는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한 '전쟁'을 수행한다. 한시 켄젤은 이와 같은 근대 국민국가의 형식적 틀에 맞추어, UN이라는 초국적 단위를 설정하였다. 물론 켄젤의 프로젝트는 실패하였고, 제국은 그가 구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꿈틀거리며 지금 이 세상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제국은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전체 공간, 즉 끝없고 보편적인 공간을 덮는 새로운 질서의 구축 속에서 긍정되는, 제국적 질서 속에서 모든 시간을 포괄시키는 새로운 권리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증후는 벨룸 주스툼, 즉 '정당한 전쟁' 개념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이 개념의 효과이다. 1993년 걸프전 과정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 서사로다시 등장한 이 개념은, 어떤 국가가자신의 영토적 통일성이나 정치적 독립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공격 위협에 직면할 때, 주스 아드 벨룸 (전쟁할 권리)을 갖는다는 생각에 주로 의거하고 있다.

제국은 그 시스템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윤리적 완성체로써 규정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정당한 전쟁, 전쟁할 권리. 이 개념은 전쟁을 진부하게 만들고 전쟁을 윤리적 도구로 칭송하는 것을 포함한다. 전쟁을 진부하게 만드는 것과 칭송하는 것. 이는 근대 정치사상과 국민국가의 국제적 공동체가 단호하게 거부했던 생각이다. 근대 유럽 세계는 끊임없이 침략과 전세계를 상대로 영토분쟁을 일삼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어디까지나 '방어'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한국군의 존재 이유가 외부의 침략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듯이). 하지만 제국에서의 적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으로 축소되고(진부화되고), 동시에 악마로서, 윤리적 질서에 대한 절대적 위협으로서 절대화된다.

이 같은 권리 형식의 변형은 개입권 (right of intervention)의 발전을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개입의 배후에 있는 것은 단지 영구적인 비상 사태와 예외의 상태일 뿐 아니라, 정의의 본질적인 가치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되는 영구적인 비상사태와 예외의 상태인 것이다. 달리말해서, 제국에 있어 경찰권은 시민(국가)들의 합의가 아닌, '보편적 가치'에 의해서 정당화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현재 제국적 질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당한 전쟁'들이 사실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다면 누가 이 총체성의 세계 속에서 정의와 질서에 대한 규정을 결정하는가? 누가 평화 개념을 규정할 수 있으며, 누가 역사를 중지시키고 과정을 통합하고, 이러한 중지를 정당할 수 있다고 부를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둘러싸고 제국이란 문제 설정은 완전히 열려 있지, 닫혀있지는 않다.

제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야만인들의 반란은 사실 그들을 끝없이 '노예상태'로 두려는 욕망이라는 것을. 제국은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에 대항한 강력한 경찰 기능을 전개하며, 자신의 질서를 원래대로 되돌리려 하지만 항상 그들은 실패한다. 제국의 위기는 조선이 외부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듯 '외부의 위협'으로 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부의 부패로 인해 붕괴한다. 부패는 새로운 생성의 선을 만나지 못했을 때 죽음의 선을 타게 된다. 그렇다면 대안은? 이 책에서 앞으로 꾸준히 연구되어야 할 제국의 근본 축을 밝히는 과정에서 드러날 것이다. (라고 네그리와 하트가 그러더라.)
by 어공 | 2006/09/21 13:34 | StudY | 트랙백 | 덧글(0)
이럭 저럭..
1. 두달 가까이 대학 하자친구들과 사회학과 친구들이랑 철학을 공부했다. 오랫만에 결과물을 들고 교수님들을 찾아갔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다고 했다. 고개를 절레 젖는다. 철학사에 대한 선이해가 없는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슨 아리스토텔레스냐고. 두 가지 반론이 있었다. 하나는 함께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이 평소 인문학에 관심이 무척 많은 친구들이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미분적분을 풀 줄 아는 친구들이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뭐냐라는 거였다. 첫째는 그냥 그렇다고 치고, 두번째 반론에 대한 교수님의 대답이 걸작이다. 미분적분은 무슨 처음부터 이해할 수 있는 거냐고. 2년 정도는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공부해야지, 능숙하게 이해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말 없었다. 비정상적이다 싶을 정도로 수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고등학생들이니, 그 정도의 난이도를 요구하는 다른 학문을 겨우 두달 밖에 안되는 시간만에 습득한다는 건 무리가 있는 거겠지. 결국 '형이상학'을 읽기는 읽었지만, 교수님은 실패였다고 보는 듯 했다. 대신 실패의 경험을 잘 점검해 두라고. 교수님은 내게 교육자의 시선을 요구하시는 게다. 난 그저, 친구를 만난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했었을 뿐이었는데.

2. 다른 교수님을 만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자문을 얻기 위해 만난 고대 철학 전공 교수님이 아닌,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기까지 커리큘럼의 골격을 세워주신 교수님.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부딪쳤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다음에 한번 친구들을 데려 올 테니,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교수님께 물어봤다. 선생님은 철학을 왜 하시냐고. 철학이라는 것에서 선생님이 발견하시는 의미는 무엇이냐고. 선생님은 한마디로 요약하셨다. 그것은 '자유'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 많은 정보들은 우리를 스트레스 받게 한다. 철학을 하면 그것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한다. 어떤 문제가 던져져도, 우리는 그것에 대한 대답을 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자유라. 사람은 철학을 하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을까. 자유로워지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 본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만화책에서 본 대사 한 구절.

"가정환경으로 살인의 원인을 묻는건 바보 같은 짓이야. 유복한 집에서는 유복했기 때문에 살인을 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가난했기 때문에 살인을 해. 평범한 집안에서도 살인범은 얼마든지 나와. 주의하라고. 앞으로 형사생활을 하려면 기억해둬야 할거야."

그렇다 이거지. 어느 순간, 어느 위치에서나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이거지. 철학을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거지. 애써 교수님의 말을 가슴에 새겨보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교수님의 면전에 대고, 중산층이 몰락하고 가난이 보편이 되는 지금 사회에서 철학의 자유가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지 못했다. 나도 이제는 자리를 가릴 줄 아는 능력을 익힌걸까. 오. 당신들이 바라는 그 능력. 이제 나도 조금씩 키워가고 있나보오. 기쁩니까?

3. 교수님의 방을 나오니 문득 날씨가 무척 흐리다는 걸 느낀다. 오늘은 2년간 쓰던 방을 뺐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느꼈던 긴장과 흥분이 조금 되살아 나는 듯 하다. 지난 2년 동안, 난 조금은 공부를 했던 것 같고, 또 조금은 사람을 만나는데 익숙해진 것 같다. 또 조금은 내가 뭐를 잘하는지도 알게 된 것 같고, 또 조금은 내가 뭐가 부족한지도 많이 배운 것 같다.

인간을 정의하는 수 많은 명제 중 가장 피부를 뚫고 오는 건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 라는 것. 앞으로 3년간은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3년 뒤. 나는 다시 이 자리에서, 여전히 철학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삽질을 즐겁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다.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던 친구 녀석 하나가, 너는 죽을 때 까지 그렇게 살거라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조금은 위안이 된다. 앞으로 보름 정도. 김상봉과 들뢰즈를 읽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남는다면, 네그리를 읽어볼 생각이다.
by 어공 | 2005/02/15 03:51 | 철학자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나르시스의 꿈 후기.
나보다 나이가 2살이 많은 누나가 있다. 평소에 티격태격, 싸움 많던 누나였지만 누나는 어딜가면 친구들에게 동생자랑을 하고 다녔다. 바로 옆에선 맨날 짜증을 부렸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세세하게 챙겨주었던, 무척 나를 아껴주던 누나였다. 누나는 내가 대학 1학년 때, 사고를 당해 지금은 이 세상에 없다.

꽃도 피워보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죽음 때문이었으리라. 뇌출혈로 보름간 중환자실 신세를 졌던 가족들의 충격은 다른 어떤 때 보다 컸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가. 어머니와 나는 병원 옆 성당을 매일 오르며, 부디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언젠가 한번 성당을 내려오던 어머니는 내 품에서 그간 억지러 참던 눈물을 쏟으셨다. 내가 살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울고 있는 어머니를 안으며,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속에서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내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일종의 신념 비슷한 것을 가져버렸던 것 같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무언가와 닿아있고 나는 내 주변의 존재들에 의해 얽혀진, 존재의 무게에 얽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생각 말이다.

만약 내가 평생 철학을 한다면,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르는) 저 경험이 지속적인 모티프로 남을 듯 하다. 계기가 있다는 것은,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 계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에 있다. 그럼으로써 나는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을 수가 있다.

첫번째로 내가 힌트를 얻은 사람은 훗설이다. 훗설의 철학은 데카르트에 의한 '주체의 발견'에서 부터 시작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때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불완전한 문장이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생각한다. 생각, 곧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뻗어 있다. 훗설은 이를 '지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대상에 대한 지향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의 존재함이 자명하다면, 따라서 대상의 존재도 자명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의식은 항상 '대상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항상 대상을 머금었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른바 의식은 어쩔 수 없이 '서로주체' 라는 것이다.

훗설을 읽다가, 학부 초 나의 철학서 읽기는 중단이 되어버렸다. 개념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훗설에서 크게 좌절을 받고 난 이후 내가 집중해서 시도한 작업은 '개념'을 가지고 노는 철학. 이른바 일상언어학파의 여러 작업들이었다. 논쟁과 토론을 반복했고, 철학적 물음들을 일상 언어로 다시 풀고 재해석하는 놀이들을 즐겼다. 물론 철학사적인 대답에 제대로 근접한 적은 많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나는 '철학의 방법'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학기 동안은 '현실적인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학을 공부했고, 최근에 다시 철학으로 돌아왔다.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은 기초에 대한 감각을 살리고, 전공자 한명을 꾸준히 파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 '서로주체'라는 개념을 독일 관념철학의 전통 속에서 확립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김상봉'이라는 한국 철학자이다. 서구의 정신은 '완벽한 자유'를 추구하는, 이른바 나르시스적인 정신이었다면 한국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언어를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자기 상실의 경험"이었다. (비유적으로 하자면 '에코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거다.) 나르시스의 철학은 지극히 아름답고 무한하지만, 그것은 '자기 확장'의 철학이었고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가간 제국주의의 역사였다. 김상봉은 이런 나르시스의 철학은 정신적으로 '진정한 만남'에 이를 수 없게 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만남은 타인에 대한 '즐거움'과 더불어 '고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홀로주체는 자기를 확장할 뿐, 타인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만남은 '서로주체'에 의해서 가능하다. 서로주체는 자기를 상실한 경험이 없는 제 1세계 국가가 아닌, 자기 상실의 경험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제 3세계 국가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경험인 것이고, 그 속에서 발현이 가능한 '정신'이다. 그리고 이는 다양성이 공존해야 하는 세계화 시대에 만남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시대의 정신으로써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독일관념 철학의 언어로 해설된 "나르시스의 꿈"은 내게 있어서, 타자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두번째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토론회가 있었다. 토론회의 수준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고급적이었다. 나르시스의 꿈에 대한 각자의 논평들. 비판의 지점을 날카롭게 잡아내고, 이 사유가 발전하기 위해서 추가해야 하는 쟁점들을 짚어내었다. 유행 담론이 사라진 한국 사회에서, 나르시스의 꿈으로 촉발된 서로주체의 문제가 어쩌면 탈식민지주의를 고민하는 새로운 대안 담론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토론회 때 노트한 것을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오늘 토론회는. 정말 재미있었다.
by 어공 | 2005/01/30 02:13 | 철학자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철학. 근대와 중세. 무엇이 달랐나.
'세상은 알레고리다.' 중세 사람들의 세계관이다. 그들은 사물의 뒷 편에 담겨있는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학문을 했다. 하지만 근대에는 알래고리로 세상을 보는 지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사태자체'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벼락'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중세 때 벼락이 쳤을 때는 "신이 노했다. -> 누군가 죄를 지었다 -> 죄에서 구원받기 위한 의례가 필요하다." 라는 방식으로 생각이 전개 된다. 하지만 근대 세계에서는 "벼락이 치는 이유는? 소리와 위치의 관계는? 벼락 칠 때 전기의 크기는?" 등을 묻는다. 근대 세계는 '사태 자체'로 사유의 방향을 잡아내려고 한 시기이다.

최근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면서, 역시나 저 설명에서 부족한 점을 찾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상은 4가지 원인에 의해 설명이 된다. 그 것은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 이렇게 4가지 인데, 근대 세계로 오면서 사람들은 '목적인'을 지워버리고 세상을 '작용인' 하나로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설명이 명쾌하다.

아무튼 이때 철학에 대해 노트 된 걸 보니, 지지리도 읽지 않은 책들 읽은 척 하기 위해 노력을 했던 것 같다. 혼자 읽은 책과, 수업 때 들은 이야기. 지금 생각하면 수업에서 들은 이야기가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역시 공부는 혼자 하는게 아니어야 하는 건가보다. 훗.

by 어공 | 2005/01/24 22:12 | Note | 트랙백 | 덧글(0)
문학이란? - 3. 독자
정현기 선생님이 구분하신 문학 활동의 세 범주. 마지막으로 독자 부분이다. (왜 작가 부분이 없어졌는지는 묻지 말라.. 그날은 아마 매지호를 벗 삼아 막걸리 삼매경에 빠져 있었을게다)


독자의 입장에서 문학을 즐기는 이유는 명쾌한 듯 하다. 그것은 '효용'의 문제다. 독자에게 던져지는 수 많은 경험 세계의 '자극' 중, '문학'이라는 것에 멈춰서서 시간을 투자하는 이유는? 두말할 나위없이 '문학'이 '볼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연히 '어떤' 효용일까? 라는 것.

역시 고전적인 문학 이론에서는 효용성에, '즐거움'과 '교훈'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나보다. 이 중 '즐거움'에 극단으로 간 것이 '유미주의'이며, '교훈'의 극단으로 빠진 것이 '좌파이론'이었다고 한다. (물론 저기서 말하는 좌파이론이란 아마 30년 대 문학을 현실참여의 도구로 사용했던 카프문학을 일컷는 말이겠지.) 물론 개중에는 교훈이라는 '쓴약'을 먹이기 위해 약 주위를 즐거움이라는 '사탕'을 바른 것 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 어딜가나 얍삽한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 ㅋㄷ

하지만 '즐거움'이라고 했을 때, 그 즐거움에 무시 못한 깊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노트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말 중에 "인생은 심심풀이다"라는 것이 있다. 아. 왠지 심오하지 않아? 그냥 단순히 폼 잡는 말이려나?


문학이 독자에게 교훈을 줘야 한다니. 요즘 들으면 정말 벼락이라도 맞을 이야기다. 작가라는 작자가 뭐가 그리 잘 났기에, 독자에게 '교훈'이라는 걸 내릴 수 있다는 걸까. 작가는 그저 자기 이약를 하는 것 뿐일게다. 하지만 그 '자기'이야기라는 것이, 타인과 소통될 수 있는 것. 여기까지 일테다. 그걸 넘어서는 강요가 되었을 땐, 무척이나 보기 흉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프로파간다와 예술은 그 경계가 애매하다. 그 묘한 경계를 잘 짚어내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라는 것. 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그렇다는 거다. 영화는 '형식'이다 라고 말들은 하지만, 사실 내가 관심있는건 영화의 형식 자체가 아니라, 영화의 형식을 빌려서 나와 어떤 감성을 소통했는가. 하는 점에 있느니까 말이다. 여섯개의 시선에서 정재은 감독의 영화가 형식적인 면에서 제일 좋았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이야기. 아쉽게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연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아래에, 『익명의 섬』(이문열)과 이청준, 그리고 윤동주에 대한 짧은 메모가 있다. 그 사람들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보기가 힘들다.


"한국에는 지식 프랑켄슈타인이 너무 많다."


독자에 대한 노트 마지막에 끄적여 둔 이야기.

by 어공 | 2005/01/24 21:57 | 트랙백 | 덧글(0)
문학이란? - 1. 작품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수업을 시작하며, 선생님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언급하셨다.

이날 정현기 선생님이 그리신 그림은 [작품 / 작가 + 독자] 라는 문학의 기본적인 골격. 문학 활동은 이 셋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노트의 위에, [문학 + 활동, 현상]이라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적혀있다.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 혹은 활동으로써, 혹은 현상으로써. 모두 접근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렸다. 생각 할 수록, 씹는 맛이 생기는 도식이다,

다시 수업으로 돌아가서, 첫째로 문학이란 '작품'라는 것이다. 그렇지. 문학은 작품이지. 이 작품은 시와 소설과 희곡, 그리고 에세이(비평, 수필, 시나리오)로 크게 분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작품이란? 정현기 선생님은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고전주의 학파의 미메시스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낭만주의자들의 시각이었다.

미메스스란 문학 작품을 자연과 사회에 대한 '모방'으로 보는 이론이다. 문학은 거울. 우리는 문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주변의 '삶'을 그대로 비춰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장르를 이용한다.

깊게 들어가면 저들 각각의 개념들에 대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최근 시나리오 쓰는 작업을 하면서, 문학이란 '자발적 감정의 분출'이라는 탐미적 시인 워즈워드의 표현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내 머릿 속으로 떠오른 이미지 (혹은 조작된 이미지)가 있으면, 그걸 연결, 연결 시켜가며 이야기를 나의 의지로 '생성'시키는 느낌이랄까. 되지도 않는 글을 억지러 짜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더 맞겠지. 한가지 확실한건, 내 삶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발견, 발상의 작업이 없이는 쓸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면 그게 시가 되는 워즈워드는 천재 아니면 거짓말쟁이임이 틀림없다.

하긴. 시나리오 작업이라는거 자체가 워낙 물리적 제약을 많이 신경써야 하는 것이니까.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시가 다른 것 보다 쓰기 어렵다고 다들 이야기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나는 시 쓰기가 소설쓰기 보다 쉽다고 생각하는건, 역시나 내가 시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기 때문인 걸까.


잡 생각을 접고 다시 수업으로 들어가자면, 여기서 정현기 선생님은 '작품'에 대한 또 하나의 지적을 하시는데 그것은 '언어'를 정교하게 다듬은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정교한 언어의 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언어는 필연적으로 '우리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물음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업의 시작에 알퐁스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언급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프랑스어를 배우는 교실. 독일군이 침략한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하는 수업. '우리말'을 한다는 것에 대한 진한 감동.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우리 글자'를 다듬는 문학인들의 이야기에 대한 정현기 선생님의 심정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 같다.

정현기 선생님이야, 뭐 항상 깊은 울림 속에서 사신 분이니까. 가끔씩은 그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싶은게 부러울 때도 있다.
by 어공 | 2005/01/24 21:40 | 트랙백 | 덧글(1)
글쓰기란.
역시 정현기 선생님의 수업때 정리한 노트다.

글쓰기란. 그러니까.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이란다. 이 평범한 이야기를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그러니까 시작이란 '앞'에서 연결되는 것이 없는 것이고, '중간'이란 앞과 뒤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끝'이란 앞만 연결되어 있고 뒤는 없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이렇게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간결하게 정리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이해하는데로 글쓰기의 저 정의를 풀어보면, 그러니까 고전적인 의미에서 글을 쓸 때는 무언가 '문제'를 해결할 때이다. 시작이란 그 '문제', 혹은 '주제' 제기 되는 곳이다. 시작에서 제기된 문제, 주제, 혹은 갈등을 이어 받은 본론은 군더더기 없이 시작 부분에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며, 결론은 그것을 매듭짓는 과정이다. 매듭이 있으니 그 뒤가 있을리 없겠지. 완결된 하나의 글은 시작과 중간과 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겠지. 그래서 정현기 선생님은 글쓰기의 기본 원리를 '통일의 원리'와 '연결의 원리'에서 찾는다. 깔끔하게 잘 쓰여진 글은, 중심적인 목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되어야 하며, 그것은 군더더기 없이 잘 연결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겠지. 글의 내용들은 여기저기서 '긴장'감 있게 연결되어야 할 필요도 있을게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사』를 쓴 thomas Caryle 는 글쓰기란 '천의무봉'이라고 부른다. 이때 천의무봉이란, 꽤맨 자국이 없다는 뜻이다. 선녀가 만든 옷에는 바늘 자국이 없다나. 군더더기 없는 글에 대한 아무 멋진 찬사다.

요즘에는 워낙 이런 고전적인 글쓰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나, 글쓰기 형식들에 딴죽거리는 글들이나 이론들이 많아서, 이 노트를 정리하는 나 조차도 고전적이라 궁시렁 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내 글은 얼마나 천의무봉에 가까웠나. 를 생각하면. OTL






by 어공 | 2005/01/24 21:18 | 트랙백 | 덧글(0)
철학자 이야기 2 . 문창옥
오늘은 문창옥 선생님.

문창옥 선생님을 처음뵌건 철학과 전공 설명회 때였다. 철학과로 진학하려는 학부생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기에, 교수님들은 다들 위기의식을 느끼는 듯 했다. 상대적으로 학생들의 숫자가 많이 몰리는 사회학과에 대한 약간의 원망어린 목소리도 들렸고.

그날 전공설명회 때,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사회에 나가서 성공한 철학자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다. 철학과를 진학해도 사회 생활을 하는데 별 무리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한 분위기? 00, 98, 95. 대학원 생. 석사. 박사. 강사님들 교수님들. 신입생들은 겨우 3명 밖에 없었던 그 자리. 전공설명회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초라했다.

그때였을 거다. 철학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모아봐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 단지 '학문'적인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고민과 어려움. 삶 속에서 철학을 어떻게 보이고 있는지를. 이야기를 모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문창옥 선생님을 3번 정도 찾아뵈었다. 아직까지는 하자센터의 철학스터디 모임에 대한 자문을 얻기 위해 선생님을 찾아간다. 오늘은 이야기의 끝에, 다음에는 이런 인터뷰를 부탁드린다고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흔쾌히 응하셨다.

오늘은 스터디에 대해 오늘 선생님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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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공 | 2005/01/18 17:37 | 철학자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철학자 1. 이상임 - 플라톤, 인류 사유의 원형
- 이상임. 연세대학교 철학자 교수. 플라톤 전공.

나는 철학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철학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 비해 지혜롭지는 않은 것 같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에게 철학자는 무척이나 무시 받는 듯 하다. 왜 그럴까? 지혜로운 사람이 무시 받는 세상.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는걸까.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무시를 받아 마땅한 것일까. 철학은 과연.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갈 수 있기는 한 걸까. 철학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무얼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문득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 주변 있는 철학자들의 이야기 부터 모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이상임 선생님이다. 이상임 선생님은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셨고, 플라톤 철학을 평생 연구하신 분이다.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철학'이라는 학문을 평생 놓지 못하고. 교수라는 직업으로까지 연결시킨 걸까.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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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공 | 2005/01/18 01:20 | 철학자 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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